일과 미래에 관해


지난 주말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어 월요일 아침 동료에게 그 계획을 말하기까지 했다. 당시 구인 공고가 한참 없던 시기였는데 그 며칠 후 X회사의 공고가 게시되었길래 거기 지원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 그곳이 가고 싶다거나 해서는 아니고 지금 회사를 우선 벗어나고 싶고 또 그 회사는 서울에, 그것도 우리 집과 꽤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주말 중 일요일(오늘이다)에 본격적인 준비를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밤 10시인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까 아주 짧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넣을 항목들을 정리한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돌고래는 이직 준비를 하는 게 버겁다면 다니고 싶은 회사 혹은 만들고 싶은 회사 지금 다니는 회사에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 써보라고 했다. 그는 예전부터 내게 이 주제로 글을 쓸 것을 부탁했는데 나는 회사들에 대해 생각하는 게 달갑지 않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서 적어도 앉아서 글을 쓰면서 살고 싶은 삶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해보기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싶다.

회사를 다니고 싶지 않다면 두 가지의 길이 있을 것이다. 프리랜서와 사업가. 나는 예전에 내가 프리랜서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였는데 내가 개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고 보니 회사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쩌면 윗사람들이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 그러면서도 개인 단위의 직업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또다른 이유가 있다. 몇 개의 회사를 다니며 회사들이 얼마나 다니기 힘든 곳인지 알게 된 후로 내가 다닐 좋은 회사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그런 데는 결국 있을 수 없고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프리랜서의 위태로운 목줄이나 열악한 복지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정말 운이 좋아서 내가 잘 나가는 프리랜서가 된다고 한들 그게 뭐가 그렇게 좋겠는가... 사회를 바꾸려면 역시 조직화된 힘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바랐던 창업은 나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구성원들이 일을 하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며 나 자신의 주위에서부터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걱정이 되기보다는 그냥 내가 지금 회사에서 겪는 고통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하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나와서 창업을 시도한다고 한들 잘될 것 같지 않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저 지금의 회사를, 힘겨운 돈벌이와 출퇴근을, 출판계를, ... 피하고 싶다. 너무 달아나고 싶다.

어제 <이끼와 함께>를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나는 원래 공부를 좋아했지. 비록 물리학을 해야 한다는 허세에 빠져 학부 과정을 실패하고 말았지만, 식물을 좋아하게 된 지금 다시 식물을 공부하면 어떨까? 로빈 윌 키머러처럼 식물학자가 되는 거야... 나는 공부가 좋다. 과학이 좋다. 그래서 나는 식물학 대학원 과정을 알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인터넷 서점을 살펴보다가 유명한 번역가 ㄱ의 프로필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는데 아, 그래 나는 번역을 해도 좋겠다. 평생은 아니더라도 만약 당장 회사를 그만둔다면 번역일로 조금씩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나는 편집자는 확실히 아닌 것 같다. 편집자는 나보다 대중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 해야 되지. 결국 나는 창업이 아니라 프리랜서를 택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처럼 사회성이 낮은 사람이 회사를 차린다는 것은 힘든 일일 것이다. 나는 조직 전체를 바라보기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편이기도 하고... 그래 사업은 무슨 사업이냐.

그런데 그중에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방식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

출퇴근에 쫓기지 않고 일하고 싶다. 내 일을 내가 만들어서 하고 싶다. 하지만 돈에 목 매고 싶지도 않다. 다양한 일을 동시에 하고 싶다. 글도 쓰고 공부도 하고 번역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식물도 기르고 뜨개질도 하고 웹도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가? 작가? 하면 좋지. 책 한두권 정도는 쓰고 싶다. 그런데 어떤 이력으로 작가가 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 아닌가? 그냥 등단만을 위해 노력하다가 등단해서 작가되는 것만큼 최악으로 재미없는 경로는 절대 원하지 않는데. 결국 로빈 윌 키머러를 꿈꾸어야 하는가? 아...

내가 가장 요즘 많이 의지하는 것은 우울증 약이다. 매일 아침 우울증 약을 먹으며 약을 먹었으니 오늘은 버틸 만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랜다. 실제로 우울증이 악화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것보다는 우울증이 다시 찾아올까봐 너무 두려운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말이 되면 생의 감각이 아주 선명하게 살아나면서 초여름의 참외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데 주말이 지나면 아주 단단한 돌처럼 굳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 최악의 생각을 하게 된다. "난 정말 끔찍하군.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걸까? 왜 그렇게 말했을까?" ...

애인이 집으로 돌아간 주말 저녁 작은 주황색 등만 켜고 누워서 우울하게 누워 있었는데 행복했다. 안전하게 우울하고 싶다. 트라우마는 유전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게 만약 부친에게서 내게 온 거라면 이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그냥 살고 싶다. 너무 자극받지 않을 정도로만. 그렇게 살면서도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밥을 먹고 청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차리고 싶은 회사에 대해 별로 상상할 수 없지만 아주 예전에 트위터에 썼던 것처럼 유리로 통창이 되어 있으면 좋겠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이 꽤 넓고 여유로웠으면 좋겠다. 투박한 나무로 짜인 사무용 가구들이 있고 식물들도 많았으면 좋겠다. 협업자들이 사무실에 놀러오면 거기서 같이 미팅도 하고 차도 끓여 마시고 식사도 할 수 있도록 부엌 설비도 갖춰져 있으면 좋겠다. 볕이 아주 잘 드는 곳이어서 겨울에도 등이 따뜻했으면 좋겠다. 내가 원하는 밀도, 공기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런 공기로 이루어진 곳에서 일하고 싶다 .




침대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