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및

by 김영대

설명
이 웹페이지의 이름 '원룸'은 웹페이지 소유자가 쓴 동명의 소설 '원룸'에서 따왔습니다. 소설 '원룸'에 대해 문화연구자 김영대가 쓴 짧은 감상은 동명의 소설에 대한 설득력 있는 감상이자 이 웹페이지의 발문으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기에 아래에 붙입니다.─소유자 주


요약

본문

<원룸>은 서사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서로 다른 담론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중첩되는 공간 자체를 상상하고 생각해보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담론들은 대개 규칙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예컨대 이 소설이 만들어내는 담론의 ‘방’에서는 1) 원룸을 선택할 때의 규칙 2) 헉슬리의 자연관의 은유가 되는 투시도법을 통해 파악된 체스판과 체스의 규칙 3) 프로그래밍 언어로 코딩된 무관점적인 혹은 객관적인 테트리스의 규칙(일정한 최소단위를 동반하는) 4) 헉슬리의 체스판에서처럼 주관적 관점에 서게 되고 그에 따라 내면의 통제, 규율, 습관을 동반하는 꿈의 규칙 5) 기본 단위인 생명 블록을 통해 생명과 유전을 파악하는 루이스 페인의 유전학적 규칙 6) 가구를 통해 원룸의 공간을 조직하는 규칙 7) 유전자를 잘라 염기서열을 편집하는 규칙 8) 출판 원고를 편집하는 규칙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규칙들 혹은 담론의 공간들이 한데 모이는 공간인 ‘원룸’은 우리가 흔히 담론이라는 개념어를 통해 무게 잡으며 예로 드는 학술적인, 전문적인 담론의 공간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것은 단순히 원룸이 사적이고 내밀한 물리적 생활공간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위에서 규칙 1, 3, 6, 8은 전문 담론의 공간에 속해 있기 보다는 일상의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지식이거나 학술적 글쓰기와 관련성이 떨어지는 것들입니다. ‘나’의 생각과 독백, 대화를 매개로 이질적인 담론들(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이 나름의 질서정연한 체계 속에서 세계를 질서화하는)이 병치되면서 <원룸>은 다소 재수없는 순도 높은 학술적 글쓰기와 다른, 어느 생활인의 내밀한 기억과 꿈을 탐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희섬(자기계발서 인간)과 루이스 페인(유전학 인간)의 대비는 흥미롭습니다. 둘은 “각각의 질서정연한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질서정연하다는 점말고는 아무런 공통점(*닮음)도 없”어서 ‘나’는 각각을 따로 만났을 때와 달리 자신의 사적 공간(원룸)에 동시에 출현한 그들의 모습에 곤혹스러워 합니다. ‘나’는 비판적으로 자기계발서를 읽는, 자신과 다른 장르의 자기계발서를 좋아하며 자기계발서에 관한 일련의 정돈된 체계를 가진 희섬에게 설득당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루이스 페인이 과학의 언어로 이야기해주는 질서정연한 세계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말하자면 한 담론의 공간에 모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꿈 속에서 루이스 페인의 크기를 줄여가면서까지 페인과 희섬을 혈연이라는 형식으로 묶기 위해, 아들로 바라보기 위해 페인의 행동과 생김새를 조목조목 뜯어가며 그와 희섬의 닮은 점을 찾으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헉슬리적 자연처럼 주관적 관점의 세계인 꿈에서 마치 테트리스의 공간처럼 객관적인 생명 블록의 동작을 이야기하는 페인은 쉽게 ‘나’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에서 ‘나’의 원룸에 희섬과 페인이 모이지 못하는 것은 필연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너무 다른 구성요소들… 서로 다른 언어가 서로 다른 현상을 각각의 장점을 발휘해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있다는 믿음은 너무 순진한 것 같다”는 나의 생각은 이 소설의 핵심을 관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변별적인 담론들의 마찰음들을 유보하고 하나의 정돈된 체계 안으로 모든 것을 끌어넣는 것, 혹은 유전학적 은유 혹은 관계(‘닮음’)를 통한 일원론 속으로 집어넣고자 하는 것이 ‘나’가 가진 주요한 의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런 배경에서 링컨 암살범과 이름이 같은(혹은 닮은) 페인이 총을 가졌는지 묻는 ‘나’는 집요하게 일원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희섬의 자식이 되고 싶어하거나 혹은 늙어가는 희섬을 참조점 삼아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에서 ‘나’가 느끼는 강박이 정돈된 규칙 혹은 담론 안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나의 불안을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나’는 일원적인, 정돈된 체계를 통해 삶을 이해하고 그 안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그를 통해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까지도 불식시키고 싶은 것일까요? 소설의 말미에서 ‘나’는 아무런 ‘공간’이 등장하지 않는 꿈을 꿉니다. 거기서는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던 “어떤 여성의 음악”을 듣습니다. 그 음악은 기억 속에 있는, 어딘가 존재하는 음악인지, 꿈의 규칙이 만들어낸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유보적이지만 ‘나’는 공간(원룸이든 담론의 공간이든)이라는 연장을 내려놓고 (어쩌면 규칙들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기억과 꿈에 관해 혹은 기억과 꿈을 통해 삶을 새로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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